김재규가 쏜 총에 맞아 박정희가 죽게 되는 10.26 사태로 국민들은 이제야 독재가 끝이 나고 진정한 민주주의 국가에 국민으로 살 수 있을 것이라는 희망에 차있었다. 하지만 박정희가 암살된 뒤 합동수사본부장을 맡고 있던 보안사령관 전두환과 육군 참모총장이자 계엄사령관인 정승화 간에는 사건 수사와 군인 사문제를 놓고 갈등이 있었다. 전두환을 중심으로 한 신군부세력은 군부 내 주도권을 장악하기 위하여 정승화가 김재규로부터 돈을 받았다고 주장하고, 10·26 사건 수사에 소극적이고 비협조적임을 내세워 정승화를 강제 연행하기로 계획하였다. 전두환 신군부 세력이 최규하 대통령의 재가 없이 육군 참모총장을 연행하고 하나회의 세력을 규합해서 권력을 장악한 군사쿠데타가 바로 1212 사태이다. 이후 보안사령관이었던 전두환은 노태우 등의 신군부와 함께 권과 정권을 장악한 후 이듬해 5월 17일 쿠데타를 일으켜서 정권을 잡았다.
이러한 전두환의 행태에 대학생들은 박정희의 부하였던 전두환은 물러가라!라고 외치며 국민이 주인인 나라를 만들고자 목소리를 높였다. 하지만 전두환은 전국에 군인을 배치하여 대학생들을 잡아들이는 한편 학생들이 모여서 시위를 주도하지 못하도록 대학교의 문을 닫아버리기도 했다. 이때 광주에서는 전남대학교에 모여있던 학생들이 군인들에게 끌려가는 일이 생겼다. 1980년 5월 18일의 일이었다. 전남대학교 학생들이 연행되는 모습을 목격한 광주시민들은 동생 같고 친구 같고 아들 같은 학생들을 지키려고 팔을 걷어 부치기 시작했다. 하지만 전두환은 군인들에게 제압할 것을 명령했고 시민들은 군인들의 굿홧발과 몽둥이 총검 등에 피 흘리고 심지어 목숨을 잃기도 했다. 분노한 광주 시민들은 군인들이 있는 도청으로 쳐들어 갔다. 그 순간 군인들이 시민들을 향해 총을 마구 쏘기 시작했다. 정말 믿을 수 없는 모습이었다. 어느 나라의 군대가 무장하지 않은 제 나라의 국민을 쏜단 말인가? 국민을 지켜야 할 군인이 국민을 향해 총을 쏘는 모습을 본 광주 시민들은 자신들과 자신의 가족, 친구, 형제를 지키기 위해서라도 싸워야 했다.
시민들은 무장하기 위해 경찰서를 습격하고 무기를 꺼내 들었다. 그리고 결국 도청에 있던 군인들을 광주 밖으로 몰아내고 도청을 점령하는데 성공하게 된다. 잠시 승리를 맛보게 되었지만 광주는 고립되었고 전열을 재정비한 군인들이 더 큰 규모로 광주로 몰려들었다. 일반 시민들이 훈련된 군인들을 이기기란 쉬운 일이 아니었기에 시민들은 비참하게 죽고 다쳤으며 군홧발에 짓밟히고 끌려가며 광주 시민들의 저항은 그렇게 막을 내릴 수밖에 없었다. 전두환이 보낸 계엄군에 맞서서 민주주의를 위해 목숨을 바쳐 싸운 5.18 광주민주화 운동은 민주화 운동의 물꼬를 튼 큰 역사적 사건이라 할 수 있다.
이렇게 국민의 목숨따위는 안중에도 없이 전두환은 권력을 향해 거침없이 나가고 있었다. 광주의 참상이 밖으로 알려지는 것을 막기 위해 신문이나 방송사를 검열해서 자신에게 반하는 기사를 내면 방송불가 판정은 기본이고 신문사나 방송사를 없애버리기까지 했다. 이러한 일련의 일들을 단 몇 개월 만에 해치운 전두환은 대한민국 12대 대통령 선거에 출마했다. 이때 선거방법도 자기 마음대로 결정했다. 국민들이 직접 투표하는 직선제를 할 경우 자신은 대통령이 될 리 만무한 것을 잘 알고 있었기 때문에 자기를 지지하는 사람들을 모아서 그 사람들만 투표하기로 한 것이다. 일명 체육관 선거를 한 것이다. 이는 보나 마나 전두환이 대통령으로 당선될 수밖에 없는 형식상의 선거였던 셈이다.
전두환은 힘으로 권력을 잡았기 때문에 힘으로 국민들을 억눌러 자신의 뜻을 이룰 수 있을 것이라 생각하고 자신에게 반하는 어떠한 목소리도 인정하고 귀 기울이지 않았다. 자신의 권력을 지키고 뺏기지 않기 위해 끊임 없이 국민들을 괴렵힌 것이다. 서슬 퍼런 정권의 아래에서도 대학생들은 포기하지 않고 전두환에 맞섰고 걔 중에는 경찰들에게 끌려가 구타당하고 모진 고문 끝에 목숨을 잃는 경우도 생겼다. 당시 서울대 학생이었던 23살 박종철 군은 민주화 운동을 한 친구들이 어디 있는지 말하라는 경찰의 고문에 목숨을 잃고 말았다. 영화 1987 속에 여진구가 바로 박종철 열사의 역할이다. 책상을 탁 치니 억하고 쓰러졌다는 경찰들의 말인지 막걸렸는지 모를 변명에 세상은 한바탕 난리가 났었다. 대학생들은 5.18의 참상을 알리고 박종철 열사의 죽음에 대한 시위를 벌였고 연세대학교에 이한열 열사는 6월 9일 학교에서 시위 도중 경찰이 쏜 최루탄에 머리를 맞아 목숨을 잃고 말았다. 이 두 학생의 죽음은 6.10 민주화 항쟁의 도화선이 되었다.
시민들은 전두환의 횡포를 더는 눈 뜨고 볼 수없었다. 광주시민을 죽인 살인자. 대학생을 고문으로 죽게 만든 살인자. 빼앗긴 국민의 투표권을 되 찾고 민주주의를 되찾자는 목소리를 높여 시민들은 거리로 쏟아져 나왔다.
국민들은 1987년 6월 날마다 거리로 거리로 쏟아져 나왔다. 경찰들이 아무리 최루탄을 쏘고 곤봉을 휘둘러도 다음날이면 더 많은 인원들이 몰려와 거리를 가득 채웠다. 이러한 시민들의 성난 모습을 본 전두환은 이승만처럼 쫓겨나거나 박정희처럼 비참하게 죽게 되는 것은 아닐까 하는 생각에 그대로 버틸 수가 없었다. 그래서 부랴부랴 헌법을 고치기를 약속하고 고친 헌법에 따라 대통령을 다시 국민의 손으로 직접 뽑을 수 있게 되었다. 우리 대한민국 정부가 처음 새워지던 날 국민이 주인인 국가가 1987년에 이르러서야 드디어 이루어진 것이다. 대한민국이 수립된 지 무려 40년 만에 이뤄낸 값진 성과였다.
우리나라의 민주주의는 우리 국민이 피를 흘려가며 맨몸으로 독재자들에 맞서 싸우며 이루어낸 점에서 더 값지다 말 할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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